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르틴 하이데거 (문단 편집) == 다른 철학자들과의 관계 == * [[에드문트 후설]] : 하이데거는 [[에드문트 후설|후설]]의 [[조교]]였다. 1928년에 후설이 프라이부르크 교수직에서 은퇴할 때도 그 빈 자리를 하이데거가 물려받았다. 하지만 1933년 후설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나치에 의해 대학 출입이 금지되었을 때 막 대학 총장에 임명된 하이데거는 스승 후설을 위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하이데거가 후설의 대학 출입을 금지했다는 소문이 있지만 그 소문은 사실이 아니다. 하이데거가 총장이 되기 전에 이미 대학 출입이 금지되었던 것이다.[* 1966년 2월 7일 알렉산더 슈반의 책 『하이데거 사유 속의 정치철학』의 서평이 「데어 슈피겔」에 실렸는데, '하이데거, 세계의 밤의 한밤중'이라는 제목의 이 서평에는 몇 가지 잘못된 주장이 담겨 있었다. 하이데거가 후설의 대학 출입을 금지했고, 야스퍼스의 아내가 유대인이기에 그 집을 더 이상 방문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그런 예였다. 야스퍼스는 이 기사를 읽고 화가 나서 한나 아렌트에게 편지를 썼다. "「데어 슈피겔」은 이런 순간이면 좋지 못한 구습으로 돌아가는군." (뤼디거 자프란스키 『하이데거, 독일의 철학 거장과 그의 시대』 박민수 옮김, 북캠퍼스, 2017, p.691)]) 하이데거는 5년 뒤 후설이 죽음을 맞이했을 때 그의 장례식에도 불참했다. 물론 도의적인 책임이 있고 하이데거가 나치의 눈치를 본 것도 사실이지만, 훗날 1940년에 발간된 『존재와 시간』 신판 앞 표지의 후설에 대한 헌사를 출판사가 삭제하였을 때에도, 하이데거는 주석에 숨어 있는 후설에 대한 감사의 말은 그대로 남겨놓았다. 즉, 나치로부터 적극적 방어를 해주지 못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후설이 유대인이라는 이유에서 그를 내쫓는 짓을 한 것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 [[한나 아렌트]] : 젊은 시절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천재 철학강사로 명성이 높았던 하이데거는 당시 학생이었던 [[한나 아렌트]]와 불륜을 저질렀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유부남이었기 때문에 계속 비밀리에 만나려고 했고 어느 순간 공개적인 인정을 바랬던 아렌트는 그와 헤어지기로 결심한다. 이후 아렌트는 하이데거의 나치행적에 실망하지만, 2차대전 끝나고 나치 부역을 가리는 심사에서 하이데거가 명예교수직 박탈과 강의 금지 처분의 위기에 처하자 그를 용서하고 그에게 유리한 증언을 해줬다. 그 뒤로 그의 지적인 유산을 인정하며 죽을때까지 서신을 왕래하며 지적인 동료 관계를 유지했다. * [[카를 야스퍼스]] : 젊은 시절 동료 교수이자 친한 친구로서 수많은 편지를 주고 받았으나 하이데거는 나치 참여 이후로 야스퍼스와의 연락을 자연스레 끊었다. 종전 이후 나치 청산 과정에서 하이데거는 야스퍼스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야스퍼스는 하이데거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했고, 이로 인해 하이데거는 강의를 금지 당한다. 하지만 야스퍼스는 끝내 하이데거를 저버리지 못하고 몇년 후 그를 용서하고는 그가 다시 강의를 할 수 있게끔 도와준다. 그렇게 해서 둘은 다시 편지를 주고 받았으나 길게 가지는 못했고 다시 연락이 끊긴다. 아렌트가 둘 사이의 관계를 정상화시키려고 노력했으나 결국 둘은 갈라서게 된다. 야스퍼스는 비망록에서 하이데거를 두고 이렇게 비판했다. "동시대인들 중에서 가장 큰 자극을 주는 사상가. 거만하고 저항하기 어려우며 신비스런, 그러나 늘 우리를 빈손으로 남게 하는 사상가." * [[장폴 사르트르]] : 하이데거는 프랑스 철학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사르트르다.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알렉상드르 코제브|코제브]]의 강의록을 본 사르트르는,[* 파리 지성인들 사이에서 하이데거가 은밀한 명성을 누리게 된 것은 러시아 망명객 알렉상드르 코제브가 1934~1938년 개설한 헤겔 강의 덕분이었다. (중략) 사르트르는 코제브의 강의를 듣지 않았으나 수강생 필기록은 구할 수 있었다. 1933/34년 겨울에 그는 베를린으로 가서 후설과 하이데거를 연구했다. (뤼디거 자프란스키 『하이데거, 독일의 철학 거장과 그의 시대』 박민수 옮김, 북캠퍼스, 2017, p.571, 574)] 그것에 기초하여 『존재와 무』를 썼다. 사르트르는 자신의 사상의 원천이 되는 하이데거를 만나고 싶었고, 2차대전 이후에 사르트르와 하이데거의 만남이 주선되었다. 하지만 몇번의 실패 끝에 1952년에서야 비로소 하이데거가 사는 프라이부르크에서 만남을 가진다. 하지만 토론은 서로 자기 할 말만 하고 끝났다. 사르트르는 나중에 하이데거를 "은퇴한 대령"에 비유했다.[* The discussion seems to have been a dialogue of the deaf; Sartre later compared Heidegger to a ʻretired colonelʼ. But on leaving, Sartre found his railway compartment full of bunches of roses. Sartre, who hated flowers, threw them out of the window (Jean Cau, Croquis de mémoire, Julliard, Paris, 1985, p. 253) [[https://www.radicalphilosophy.com/article/prequel-to-the-heidegger-debate#fn54|#]]] * [[자크 라캉]] : 라캉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라캉은 실존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인다. 그것은 인간이 모든 형태의 본질과 분리되어 있다는 관념이다. 라캉은 존재가 존재자에 대해 지니는 거리로부터 영감을 받는다. 그가 하이데거를 인용할 때마다, 그 이유는 실존이라는 개념과 죽음을 위한 존재를 이용하기 위해서이다. 실제적 삶이 실제적 삶이 아니라 상징적 삶이라는 라캉의 사상은 "우리가 하이데거의 작품 도처에서 만나는 사상이다. 그것은 그의 철학의 본질 자체이다." 이와 같은 영향은 바로 라캉의 패러다임들 속에서 쉽게 간파된다. 우리는 그 속에서 하이데거의 근본적인 비관론, 인간의 탈중심화, 자기 자신에 결코 도달할 수 없이 균열된 상황에 처한 주체의 해체, 거울 구조의 단계로부터 존재의 망각, 즉 상실의 긴 여정과 다시 만날 뿐 아니라 하이데거의 어휘에서 빌린 것들도 식별해 낼 수 있다. 진리 및 진실성과의 관계, 충만 및 공허의 말과 관련되는 모든 것은 정신분석학의 영역 속에 옮겨 놓은 하이데거의 방법에 속한다. 그리스 철학과 진리에 관한 모든 설명은 그들에게 공통적이다. 《도둑맞은 편지에 관한 세미나》에서 구조주의적 모델로 귀결되는 편지의 순환성은 편지의 장소 자체, 즉 편지가 제자리에 없는 장소인 진실이 드러나는 장소에 관한 하이데거의 주제에 의해 동시에 뒷받침된다. 따라서 50년대 초기에 라캉은 하이데거에게 실질적으로 매혹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매혹은 일방적이었다. 왜냐하면 하이데거는 줄곧 라캉의 작업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라캉이 하이데거 철학의 지지자인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없고, 그가 빌린 것들을 어휘의 문제로 축소할 수 없다. (프랑수아 도스 『구조주의의 역사 Ⅱ』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2, p.251)] 라캉은 1950년에 장 보프레의 도움으로 독일 프라이부르크로 넘어가서 하이데거를 직접 만나는 열정을 보였다. 이 때 하이데거의 글 「로고스」를 번역해 하이데거에게 보여 주고, 1953년 자신의 잡지에 이를 게재하면서 하이데거를 칭송하는 글을 썼다. 1955년 8월 하이데거는 한 대담에 참여하기 위해 프랑스에 왔는데, 이 기회를 이용하여 라캉 부부는 하이데거 부부와 지역의 대성당을 보러갈 기획을 세웠다. 그 성당으로 가는 동안 라캉은 미치도록 빠른 속도로 차를 몰았다고 한다. 앞좌석에 있던 하이데거는 가만히 있었지만 하이데거의 아내 엘프리데는 속도가 너무 빠른 것이 아니냐고 항의했다... 심지어 라캉의 아내 실비아도 적당히 밟어라고 주의를 줬는데도 라캉은 신나게 자동차 [[액셀]]을 밟았다고 한다.[* 프랑수아 도스 『구조주의의 역사 Ⅱ』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2, p.250 참조.] 이런 친절(?)을 베풀었지만 정작 하이데거는 라캉의 작업에 관심이 없었다. *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 : 가다머는 하이데거가 마르부르크 대학교 철학과 조교로 있었을 때부터 그의 강의를 들었던 제자들 중 한 명이다. 하이데거는 이 때도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었는데, 그의 제자들은 하이데거의 헛기침을 따라하고 다녔으며, 하이데거의 용어인 '드러내 보임', '세인', '잡담', '빠져 있음' 등을 쓰는 것이 학생들 사이에 유행했었다고 증언한다. *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 젊었을 때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 감명받아 스스로 찾아가서 제자가 된다. 하지만 하이데거가 나치에 협력하자 이에 크게 실망하였고, 이후 마르쿠제는 다른 길을 선택한다. 이후 하이데거의 나치 행적에 대한 증언을 통해 하이데거를 비난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하이데거의 사상까지 버린 것은 아니라서 이후 마르쿠제의 철학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